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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연참여 게시판

그때 그 아이를 소개합니다 작성일 2023.06.05
작성자 집시인생

그때 그 아이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려고 합니다. 그 아이는 약 16년 전 추운 겨울 1월 중순 즈음 갓 스무 살이 넘은 나이 어린 엄마의 딸로 출생했습니다.

 

 

아이의 엄마는 대학교 1학년 때 사귀던 남자의 아이를 임신하게 되었고 그로 말미암아 양가 부모님은 서둘러 결혼 예식을 치르기로 합의 했고 결혼식을 치른 후 한 달 후 그 아이를 출산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이를 출산한 후 바로 고부간의 갈등이 시작 되었습니다. 곧 일 년에 열 두 번의 제사를 지내야 하는데 아이의 엄마는 하나님을 신앙 하는 자신의 믿음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시댁에서 한번의 제사를 지내게 되었는데 그 아이의 엄마는 모든 것을 거부했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고부간의 갈등은 더욱 심각해졌고 결국 아이를 출산한 후 3개월 만에 합의 이혼을 할 수 밖에 없었었습니다. 그때 아이의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의 적극적인 권유와 응원이 있었기에 합의 이혼을 쉽게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혼 후 누가 아이를 양육하느냐는 하는 문제로 심각한 일이 벌어졌다. 여느 가정과는 다르게 아이의 부모는 서로 아이를 양육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남자의 가정에서는 아이를 빌미로 이혼을 막으려는 속셈이었고 아이의 엄마는 진실 된 마음과 사랑으로 아이를 양육하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 아이의 엄마는 자신이 딸을 양육하는 조건으로 한 푼의 위자료도 받지 않고 아이와 함께 친정으로 올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당시 학교를 다녀야 했기 때문에 어쩔 때는 아이와 함께 학교에 가서 공부를 했고 그렇지 않을 때는 친정 엄마가 그 아이를 양육했습니다. 그러나 친정 부모님은 딸은 물론이고 외손녀의 장래를 위해 3개월 된 외손녀를 친 양자로 입적(入籍)시켜 친 자녀로 양육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외손녀는 할아버지 할머니를 아빠 엄마로 알고 그렇게 따랐고 아이가 엄마 아빠라고 부를 때마다 할아버지 할머니도 당연히 그렇게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그 기간은 그 아이가 성인(20)이 될 때까지만 그렇게 하기로 계획을 세우고 기쁨과 감사로 양육할 수 있었고 어린아이를 양육하는 일은 주로 할머니가 맡아서 했습니다. 그러던 중 아이가 두 살 정도 되었을 때 일입니다. 한밤중(새벽 1시)에 갑작스럽게 경기(驚氣)를 일으켜 얼굴이 새파래지고 몸이 굳어갔습니다. 그때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그 아이를 안고 급히 응급실로 가야 했고 약 2주 간의 치료를 받은 후 퇴원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퇴원하기 전 담당 의사로부터 청천벽력 같은 말을 듣고 말았습니다. 어린아이의 병명이 간질 병(뇌전 증)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어릴 때부터 간질 약을 먹이지 않으면 위험하다고 했습니다. 의사의 그런 말을 들은 어린아이의 할아버지와 할머니(부모)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생각으로 힘들었습니다. 그런 와중에 마침 병실에 함께 있던 어느 할머님으로부터 실낱 같은 반가운 소식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아주 오래전 당신의 자녀도 그런 일이 있었는데 어느 한의원을 갔더니 그것은 간질이 아니라 경기(驚氣)로 침을 맞고 완치되었다면서 그 한의원을 알려주셨습니다.

 

 

그래서 부랴부랴 퇴원을 하고 병원에서 먹이라고 하는 약을 처방 받았지만 먹이지 않고 한의원을 찾아갔습니다. 원장님은 그 할머님이 말씀하셨던 대로 맥을 짚더니 이는 간질이 아닌 경기(驚氣)니 염려 말고 침을 맞으라고 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병원에서 처방 받은 간질 병 약을 다 버리고 얼마 동안 침을 맞았습니다. 그 후 어린 아이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건강해졌습니다.

 

 

그렇게 해서 그 아이는 유치원을 들어갔고 할아버지 할머니는 어린아이의 학부모가 되어 유치원 행사 때 마다 부모 자격으로 참석했습니다. 그때 아이의 친 엄마()는 워크비자를 받아 멀리 호주로 갔고 자기가 전공했던 네일 아트를 하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잠시 한국에 들어온 친 엄마는 다시 호주로 나가면서 자기 딸을 데리고 갔습니다. 자신의 딸이 얼마나 그리웠는지 그곳에서 얼마 동안 함께 지내다가 한국으로 보내겠다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때 그 아이는 4살이었고 그때까지 그 아이는 친 엄마를 언니라고 알고 있었고 그렇게 불렀으며 그렇게 따라다녔습니다. 그래서 두 사람은 호주로 갔고 이(2)주 후에 그 아이는 항공편으로 혼자 한국에 돌아왔습니다.

 

 

물론 승무원의 돌봄으로 혼자 호주에서 한국까지 올 수 있었지만 그 아이가 인천공항에 도착했을 때 승무원의 말을 빌리면 비행기 안에서 많이 아파했고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어린 마음에 많이 불안했을 것이 분명한 일이었습니다. 혹이라도 공항에 도착했을 때 엄마(할머니)를 만날 수 없을지도 모른 다는 생각이 그 아이의 마음을 그렇게 불안하게 했다고 후에 엄마에게 들려주었다고 했습니다.

 

 

이런 저런 일을 겪으면서 그 아이는 잘 성장해 갔습니다. 어느 날 그 아이는 엄마(할머니)와 함께 피아노 학원을 들릴 일이 있어 들리게 되었는데 그때 그 아이는 피아노를 배우겠다고 때를 썼다고 했습니다. 그때 나이가 네 살(3)이었으니 학원 원장은 물론 엄마는 안된다고 말했지만 너무나 때를 써서 할 수 없이 피아노 학원을 보내기로 하고 원장의 허락을 얻어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많은 욕심을 가진 그 아이는 하루도 빠지지 않고 피아노 학원을 잘 다녔고 초등학교 4학년 때 피아노 실기 2급을 취득했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방과 후 공부를 가르쳐 주는 곳에서 우클렐라와 바이올린 색소폰 첼로 등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도록 까지 배웠습니다.

 

 

그 아이가 그토록 잘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엄마로 알고 그렇게 따르던 외할머니의 돌봄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게 지내는 동안 그 아이는 지금까지 언니로 알고 있던 사람이 친 엄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그동안 그 아이를 양육했던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는 친 양자를 파양(罷養)했고 초등학교 5학년이 되었을 때 봄 그 아이와 친 엄마는 뉴질랜드로 함께 떠났습니다. 그곳에 가서 초등학교를 들어가게 되었고 일 년 동안 공부를 했지만 언어의 어려움과 한국인이라는 차별 때문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욕심이 많았던 아이였기에 약 2년의 시간이 지나 고등학교(한국은 중학교와 고등학교가 분리되어 있지만 뉴질랜드에는 고등학교로 통일되어 6년의 공부를 한다고 함)에 입학했을 때는 선두에 설 수 있었다고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한국에서 익힌 악기들을 다루는 재능을 그곳에서 100% 발휘하여 학교와 여러 곳의 대회에서 우승하는 일들이 벌어졌고 지금은 고등학교 4학년이 되었는데 음악 대학을 진학하기기 위해 준비하면서 소망 가운데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 17살의 숙녀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일은 그 아이를 그토록 훌륭하게 돌봐주셨던 외할머니는 3년 전 불치병과 싸우다가 세상을 떠나 천국에 가셨지만 코로나라는 큰 장애물이 발길을 가로막아 할머니의 마지막 가는 그 길을 볼 수 없었고 그 아이는 그곳에서 많이 슬퍼하면서 약 3개 월 동안 힘들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 아이는 지금 외할머니의 사랑을 기억하면서 더 힘차게 살아가고 있을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천안시 서북구 입장면 외유리 2길 17-8. 하늘사랑교회에서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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