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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사항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작성일 2014.08.05

"성경적 찬양론"을 시작하면서 오래 전에 블로그에 올렸던 글을
프롤로그 로 올립니다.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당신은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태초부터 시작된 하나님의 사랑은…

정확하게 기억이 나지 않지만 이 찬양을 처음 들은 때가 아마 러시아
현지인 교회를 섬기다가 사역을 이양하고 모스크바 장로교회를 다시
섬기게 된 2001년 쯤으로 생각됩니다.
여러 해 동안 러시아 현지교회를 섬기면서 한국에서 드려지는 찬양에 대한
정보를 거의 접하지 못하고 있다가 모장교회를 섬기게 되면서 한꺼번에
새로운 찬양을 많이 접하게 되었는데 이 찬양도 그 중에 한 곡입니다.


교회의 젊은이들이 부르는 이 찬양을 듣고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당시 한국 CCM 에서 많이 사용되던 리듬과 발라드 형식의 감미로운 선율을
사용한 곡으로 참 아름다운 찬양이구나 생각이 되었지만
가사의 내용이 평생 장로교 교인으로 선교사로, 찬양 사역 자로 살아 온
제가 받아 드리기 힘든 것이었습니다.

결정적으로 문제가 되는 중간 부분에 나오는 가사.
“태초부터 시작된 하나님의 사랑은”
이란 가사를 듣는 순간 등에 식은 땀이 흐르는 것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이 찬양은 한국의 대부분의 산부인과에서
아이가 태어나는 순간  병원에서 내 보내는 축하 음악으로 사용할 만큼
예수를 믿지 않는 분들도 많이 알고 애창하는 노래였고
CCM으로 공전의 히트(?)를 친 찬양이었습니다.

왜 등에 식은 땀이 나왔냐고요?

이 찬양의 가사가 가지고 있는 너무나 위험한 신학적 오류 때문입니다.

먼저 인간의 창조 목적을 성경을 통해 알아 보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교회음악인들이 늘 암송하는 이사야 43장 21절 입니다.
“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해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

그리고 장로교회의 교리 문답 1번 문제 입니다.
1. 사람의 제일되는 목적은 무엇입니까?
답) 사람의 제일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을 갖지 않은 사람들이 인본주의적 입장에서 이 말씀을 접하게 되면
강한 어조로 이 말씀의 독선적 요소를 지적하고,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지나치게 자기 중심적 신 이라고 주장 할 수 있는, 그런 성경 구절이고 신앙고백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함을 받은 성도들은 이 말씀이야말로
기독교 신앙의 핵심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
그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추구할 삶의 최상의 가치요, 목적입니다.

내가, 나를 위해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
이 짧은 구절 안에 하나님은 세 번이나 자신을 나타내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결정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주권을 주장하십니다. = 내가.
그리고 하나님 자신을 위해 우리를 존재케 하셨습니다=나를 위해
찬송은 하나님의 것이라고 자신의 소유권을 주장하고 계십니다=나의 찬송을

성도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존재해야 합니다.
그것은 속박이 아니고 기쁨이고 감사며 놀라운 은혜요, 축복입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며 그 분을 영화롭게 하고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축복인지는 경험해 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하늘에 속한 비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합니다.
독생자를 아낌 없이 주시기까지..
그러나 우리의 존재 목적은 사랑을 받기 위한 것이 아니고 이 놀라운 사랑을 주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것입니다.

에베소서 1장 3절에서 14절에는 기독교 복음의 핵심인 하나님의 예정과
성 삼위 하나님의 구원 사역이 기록 되어 있는데, 로마서와 함께
구원 론에 관한 바울 신학의 중심이 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4절 내용 입니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모든 개혁주의 교회들이 고백하는 신앙고백의 핵심인 이 예정론은
창세 전에 이미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녀로 선택 하시고 구원하시기로
예정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 교리에 대해 감리교나 다른 교단에서 조금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의 개혁주의 교회들이 받아 드리고 있는 신앙의 가장 핵심적 고백입니다.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났고, 천지가 창조 되면서 하나님의 사랑이 시작 되었다는
이 찬양의 가사는 개혁주의 신앙을 믿음의 기조로 받아 드리고 있는 저로서는
도저히 용납 할 수 없는 내용의 가사 입니다.

물론 창세기의 태초(베레쉬트)와 요한복음의 태초(아르케)는
언어적으로 다른 해석을 가지고 있지만
이 노래에서 사용되는 태초는 시간의 시작인 창세기의
태초라고 해석할 수 밖에 없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미국 교회에서 시작된 복음성가는 다양한 음악적 형태를 가지고 있는데
그 중 한 가지가 CCM 입니다.

물론 어느 시대고 CCM은 존재 하였습니다.
조금씩 다른 이름으로 불려 지긴 했지만,

CCM은 어느 시대고
진보적 사고를 가진 젊은이들이 기존 교회음악과 다른 찬양을 추구 하면서
생기게 되는 교회음악의 시대적 문화현상으로, 이렇게 생긴 수 많은 찬양들
가운데 정선 되어서 예배음악에 사용 되었고 시간이 지나 가면서 그것이
전통적인 예배음악으로 자리를 잡아가곤 했습니다.

이런 과정을 통하여 교회음악은 시대마다 조금씩 다른 음악적 옷을 입게
되었는데, 이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고 최고의 음악가 이면서 감상자
이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라 생각 됩니다.
이런 사상은 시대마다 교회음악인들 사이에서 많은 논쟁을 일으키는 주제가 되어왔고
지금도 교회음악인 사이에서 교회음악을 보는 학문적 시각이 다른 사람들이 첨예하게
논쟁을 하고 있는 주제 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교회음악은 음악적 옷을 어떤 것으로 입었느냐도 중요하지만 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음악에 사용하는 택스트 즉 가사가 더 중요하며
음악은 그 가사를 잘 전 달 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 된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에베소서 5장 19절과 골로세서 3장 16절에서 말씀 하신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는 음악적 기준을 설명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찬양 하는데 사용할 가사의 기준을 설명해 주신 말씀 입니다.

시는 시편을, 찬미는 칸티클(시편 이외의 수많은 성경의 찬양들)을,
신령한 노래는 시대마다 성령의 감동으로 주신 찬양의 가사들 이라는 것이
대부분의 교회음악인들과 신학자들이 동의 하는 해석입니다.

가장 좋은 찬양 가사는 시편을 그대로 사용하거나 조심스럽게 의역하여
사용하는 것이고, 성경 여러 곳에 있는 칸티클을 가사로 사용하는 것이지만,
성령의 감동을 받은 성도들이 쓴 성경적으로 신학적으로 문제가 없는
가사를 사용하여 찬양을 만들어 하나님께 제물로 드리는 것 또한 초대교회
이후 모든 교회들의 전통이 되어왔습니다.

문제는 신학적, 성경적 지식이 부족한 젊은이들이 쓴 시로 전문적인
음악훈련을 받지 않은 작곡가들이 작곡을 하여 가사나 음악이 검증되지
않은 상태에서 무 분별하게 교회에서 찬양되는 것입니다.
예배용 찬송가는 수 많은 목사님들과 교회음악 전문가들이 오랜 기간 동안
검증 작업을 거치고 각 교단의 신학적 입장을 반영하여 만들어 집니다.
그러나 CCM으로 대표되는 복음성가는 이러한 검증 절차가 없다는 것입니다.

신앙의 기조를 송두리째 엎어버릴 내용의 가사를 가진 찬양이 검증도
되지 않은 체 불려 지면서 이 찬양들이 신학적, 성경적 지식이 부족한
젊은이 들의 신앙체계에 미칠 영향을 생각하니 등에 식은 땀이 나오는
것입니다.

저는 이 배후에 타락한 찬양천사 루시퍼, 사탄의 계략이 숨어 있다고 봅니다.

사이비 교회음악.
사이비의 사전적 의미 =겉으로는 비슷하나 속은 완전히 다름. 또는 그런 것

겉으로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 같지만 깊이 보면, 자세히 보면
완전히 달라서 젊은이들에게 성경이 아닌 다른 사상을 심어주게 되는
그런 찬양들이 한국 교회 안에 얼마나 넘쳐 나고 있는지 모릅니다.

“찬양의 주인이 하나님이 되게 하라.”
인본주의적 찬양, 사람이 주인이 되는 찬양이 한국교회 안에서
자리를 잡지 못하게 되는 그 날이 오길 소망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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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그램 정보

[종료]  내 영혼의 찬송
토~주일 19:30~20:00
제작 / 진행 김성식